중도, 지혜로 나아가는 길
Paragraph 1.12.1
중도, 지혜로 나아가는 길
‘팔정도만이 유일하게 해탈·열반을 성취하는 길이다. 그런데 그 팔정도란 다름 아닌 중도다.’1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얘기와 관련시키면 팔정도의 중도로 식을 소멸할 수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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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12.2
제가 중도中道와 중용中庸의 차이에 대해서 가끔 말씀드립니다만, 중용과 중도는 다릅니다. 이른바 서양에서 말하는 황금 중간the golden mean이 바로 중용이지요. 그 중간과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용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것입니다. 즉 지나침도 못 미침도 아닌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떻게 보면 처세의 철학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중도는 판연히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과불급을 피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중도는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과격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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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12.3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예로 들어봅시다. 불교에서는 처세에 융통성을 발휘해서 적당히 거짓말 안 하고, 필요하면 거짓말도 좀 하고 이런 식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철저히 안 하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목숨 걸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세상하고 타협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거짓말에 관해서라면 철저히 안 한다.2 오히려 그게 중도이지요. 그런데 왜 그게 중도인가? 중용과 유사하게 보면 중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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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12.4
수행을 할 때는 고苦와 낙樂의 양극단을 거부하는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또 사유에 있어서는 유有와 무無의 양극단을 배제하는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실천에서는 고와 낙을 배제하고, 사유에서는 유와 무를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극단적 고행과 극단적 쾌락 모두를 배제하고,3 사유를 할 때는 ‘뭔가가 확실히 있다.’ 혹은 ‘아니다, 확실히 없다.’ 하는 극단적 사고4를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 유와 무로써 사고하는 것은 식의 놀음이지요. 식은 지혜가 가려지고 막힌 상태라고 볼 때, 유무의 극단을 배제하는 것은 지혜로 나아가는 중도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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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12.5
나아가 상想, 즉 산냐는 식 놀음을 이어받아서 대상을 객체화시키고, 나로부터 소외시키고 대상화하면서 인식하고 사유하는 것입니다.5 이 산냐가 들어서서 우리를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쪽으로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온갖 것들을 상상하고 추상해서는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기능 때문이지요. 산냐의 이 신기루 만들기 때문에 모든 극단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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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12.6
팔정도의 중도는 산냐의 작용을 억제시킴으로써 산냐를 중화시킵니다. 중도는 산냐의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식까지도 억제합니다. 그럼으로써 유무의 극단으로 세상을 보는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지혜의 길로 들어갈 문을 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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