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과 산냐想
Paragraph 1.7.1
명색과 산냐想
결국 우리는 식이 거짓 법인 명색을 가지고 놀음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명색은 실체가 아니므로, 식 놀음은 실체가 아닌 현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지요. 이것을 불교에서는 상想이라고 표현합니다. 빠알리어로 ‘산냐saññā’입니다. 산냐는 오온五蘊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지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에서의 상이 바로 산냐입니다. 불교에서 세상을 설명하는 아주 창조적인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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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2
부처님은 식과 상이라는 두 용어를 특별히 강조해서 오온에서 쓰고 있습니다. 식을 ‘우리가 음식을 맛보며 맵다, 쓰다, 시다, 달다를 아는 능력’1이라고 비유하십니다. 반면 상想은 ‘희다, 푸르다, 붉다 하고 아는 능력’2이라고 비유하여 두 용어를 비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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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3
희다, 붉다를 아는 능력과 쓰다, 맵다를 아는 능력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쓰고 맵고를 아는 것은 바로 체험적이고 사실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은 내 육신에 비쳐서 바로 알 수 있는 개인적이고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앎입니다. 반면 희다 붉다 푸르다 하고 아는 상은 명칭에 의한, 관념에 의한 앎입니다. 그것은 직관적인 앎이 아니라 중간에 한 단계 개입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 개입 요소를 요새 용어로 말하자면 문화적인 또는 사회문화적인 개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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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4
예를 들면 저것을 ‘붉다’라고 이름 지어놓고 ‘붉다’ 하고 알 때는 붉음에 따른 여러 부수 관념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앎이 상에 내포된다는 뜻입니다. 상은 주관적인 앎도 아니고, 객관적인 앎도 아니고,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성원들이 공통으로 갖는 문화적 주관성입니다. 식이 개별적 육신에 갇혀 있는 개개인이 느끼는 주관성이라면, 상은 어떤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느끼는 집단적 주관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식은 피부로 직접 느끼는 감각적 또는 실제적, 체험적으로 차이를 지각하는 보다 원천적인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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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5
십이연기에서는 뭔가를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는 촉觸을 하면 수受가 일어난다고 설명하는데, 이때 촉과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산냐’입니다. ‘산냐’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오히려 수는 촉을 거쳐서만 일어나지요.3 즉 촉이 없으면 수가 없는데, 산냐는 촉이 없어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4 일단 이 말은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산냐라는 것이 우리의 지각 행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만 일단 알아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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