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 경험’도 중도
Paragraph 6.7.1
‘온몸 경험’도 중도
예를 들면 ‘이뭐꼬’하는 수행법을 봅시다. 우리나라 선종에서 하는 ‘이뭐꼬’도 벌써 추상 개념입니다. 여기는 산냐가 작용하지 않을 수 없어요. 상想, 즉 인식 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타나는 것을 대상화시켜 인식해요. 관찰의 대상이 되든 사고의 대상이 되든 대상화시켜서 인식하는 것이 상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상 놀음을 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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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2
그러면 어떤 문제가 있느냐? 우선 대상의 범위가 굉장히 커져버립니다. 무한대로 넓어져 바깥으로 한없이 뻗어나가서 저 우주를 담고도 좁은 거지요. 그러면 장쾌한 맛은 있겠지만 사실은 이미 바깥에 정신을 뺏겨 버리는 겁니다. 상 놀음을 하면 정신을 빼앗기기 쉬워요. 그래서 선지식들이 상 놀음에 대한 경책의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몸의 어느 한 군데에 집중하면 정신 집중을 일으키기에는 좋겠지만 너무 좁아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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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3
그런데 부처님은 ‘온몸’이라고 했어요. ‘온몸’은 나라는 존재를 담는 전부인데, 바깥에 비하면 좁고 몸 어느 한 부분에 비하면 넓지요. 그러니까 온몸을 경험한다는 것도 중도中道입니다. 앞에서 ‘앉는 것’이 중도라고 했는데, ‘온몸을 경험하며 호흡한다’는 것도 중도입니다. 그러면서 산냐를 중지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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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4
결국 중도는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게 참 어렵습니다. 산냐는 우리의 통상적 인식인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그릇이 있다고 합시다. ‘그릇’이라는 말에는 이미 어떤 관념이 담겨 있습니다. ‘물그릇에는 물을 담고’ ‘이태리 그릇은 비싸고’ ‘유리그릇은 위생상 좋고’, 별별 관념이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관념으로 그릇을 보는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축적된 정보나 관념들에 젖어서 보니까 있는 그대로 못 봅니다. ‘그릇’이라는 이름도 우리가 붙인 것이지요. 이 그릇이 대답할 능력이 있다면 ‘나는 그릇이요’라고 스스로 말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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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5
결국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못 보고 우리가 붙인 이름으로, 우리 관념으로, 우리 편할 대로 일방적으로 우리 식으로 봅니다. 주관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과학적 객관성까지도 넘어서 정말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보는 습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관적 버릇을 하나하나 찾아내어서 그것을 밀쳐내고, 아무런 주관의 개입이 없이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중도로 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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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6
인식한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바깥의 뭔가를 눈으로 본다는 것도 이미 상상입니다. 인식 자체도 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전의 경험을 온통 동원해서 ‘저게 뭐였고, 이름이 뭔데’ 하면서 대상을 아는데, 이처럼 과거 기억이 작용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인식입니다. 그런 과거의 경험, 미래에 대한 예상, 바깥에 대한 추측을 떠나야 실다운, 실질적 지혜의 지각, ‘참다운 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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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7
무엇이든 경험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상상만 해서는 안 되지요. 불교 공부는 상상의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세속 공부야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불교 공부는 상상의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상想 놀음, 식識 놀음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아프다’라는 사실은 현재 여기서 아픈 것이니까, 과거의 기억을 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거지요. 그러나 저 사람이 아픈 것은 내가 직접 느끼지 못하지요. 그러면 과거 내 경험을 다 동원해서 상상할 수밖에 없어요. 어디가 아프냐? 어떻게 아프냐? 그렇게 따지면서 내 경험의 전부를 동원해야 합니다. 그건 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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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8
내 몸은 볼 때는 상상이 필요 없어요. 있는 그대로 딱 확인할 수 있는 이 몸, 바로 이 몸을 총동원하여 마음챙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딱 중中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도 안 되고 어느 한 부분에만 빠져도 안 되니까, 온몸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근본불교의 입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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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9
부정관不淨觀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보고 있거든요. 머리카락이 있고, 피부가 있고, 뼈가 있고, 살이 있고, 발톱이 있고……. 모두 내 몸이고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상상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똥오줌을 보는 것이거든요. 몸의 서른두 가지 부분을 다 확인할 수 있어요. 그걸 관찰할 따름입니다. 그걸 벗어나도 안 되고, 또 그 중 한 부분에 너무 빠져서도 안 돼요. 이것이 중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부터 시작해서 경험 대상까지 중도로 일관해서 계속 나가는 것이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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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6.7.10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러분이 앞으로 참선할 때는, 입정入定하기 전에 한 5분이라도 자비관을 염하라는 부탁을 꼭 드립니다. 자비관은 산냐의 논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주관이 안 생깁니다. 아무리 오래 해도 해가 없어요. 때가 끼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때가 끼면 있는 그대로를 못 보고 색 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자비관을 염하는 것도 중도로 보기 위한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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