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의 짜임새
Paragraph 3.8.1
순서의 짜임새
다음으로 네 가지 진리의 순서를 돌아볼 수 있어요. 왜 부처님은 고의 멸, 즉 ‘열반’을 바로 말씀하시지 않고 ‘고’와 ‘고의 집’을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보통 처음이나 끝을 중요시하지요. 열반이 제일 중요하다면 처음에 오거나 끝에 가야 할 텐데 사성제 각 항목의 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고의 멸이 세 번째에 어중간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는 흔적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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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2
일반적으로 볼 때 사성제의 중심은 ‘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가 맨 끝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뭘 의미하는가? 그걸 생각해보려면 처음으로 가야 합니다.
‘고’. 우리에게 ‘고’가 없다면 이 세상에 파묻혀서 오욕락을 즐기기에 분주하다가 끝나버리겠지요. 고가 없다면 뭐 때문에 그 좋은 오욕락 놔두고 수행하려고 하겠어요? 고가 없다면 뭣 때문에 그 좋기만 한 오욕락을 다 놔두고 수행을 하려고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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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3
이 사바세계에서는 ‘고’가 진리에 대한 갈증을 느끼도록 만드는 유일한 장치입니다. 고가 없으면 사람이 도저히 사람다워지질 않지요. 가난의 고, 늙음의 고, 죽음의 고, 인간관계 갈등의 고 등 별의별 고를 겪어야 사람이 비로소 고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벗어날 궁리를 하니까 그때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가 시발점으로 중요합니다.1
〈고요한소리〉 회원 중에 한 분이 언젠가 ‘문제는 고야. 고를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린 거야. 그게 근간 같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내가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요체가 고라는 것, 정말 고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고苦로 관찰하는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의 성찰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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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4
그런데 ‘고苦’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공식적으로 말하는 세 가지 고, 즉 고고성苦苦性, 행고성行苦性, 괴고성壞苦性“2을 교과서식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말고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는 부처님이 해탈·열반을 이루고서 이 세계의 실상을 보신 후 우리 중생에게 해주신 현실 고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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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5
우리가 꼭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일체의 행복이나 즐거움, 기쁨의 종착점은 고다. 그래서 반드시 고로 돌아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구조적인 고라는 말을 가끔 씁니다. 무슨 우연한 고나 일시적인 고가 아니다, 고는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 존재가 본질적으로 고존苦存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고로부터 벗어나려는 바른 공부가 시작되기에 맨 처음에 있게 된 것입니다. ‘고’라고 현실 고발을 하고서 고의 연유를 상세히 설명하신 대목이 십이연기입니다. 현실이 고라면, 다음으로 고가 왜 발생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성제의 전반은 고라는 현실과 그 발생과정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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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6
사성제의 후반은 고의 현실로부터 벗어남에 관한 소식입니다. 세 번째 멸성제는 ‘이러한 구조적인 고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입니다. ‘여기 고의 멸이 있으니 이리 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바로 멸성제 때문에 차안此岸에서 고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저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벗어난 경험을 토대로 인류 모두에게 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안으로 갈 수 있느냐?’만이 남은 문제입니다. 이렇게 고, 집, 멸의 순서상 논리를 이해하면 도가 뒤에 오는 것이 당연해집니다. 그때부터는 이 팔정도 길을 실제로 걸어 나아가는 행위가 중요해집니다. 이렇게 해서 불교의 진리가 팔정도로 종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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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7
‘고’로부터 시작하여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이르는 합리적 순서 때문에 열반은 시렁 위에 높게 올려놓은 목표가 아니라 인간 누구나가 손을 뻗쳐 잡을 수 있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팔정도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이상이 아니라 바로 일상생활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자 문화권에 태어났기 때문에 ‘도인道人’이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접하지요. ‘도인’ 하면 ‘일을 해 마친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는 도인이라는 말이 남용되고 신비화된 결과입니다. 이때 도는 역시 관념화된 것입니다. 도가 관념의 길이 되어버리면 정말 구제 불능이지요. 길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우리가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인 길로서 팔정도는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입니다. 불교에서 도인이란 말이 있다면 그것은 ‘팔정도라는 일상적 길을 걷는 사람’이라야 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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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8
예를 들면, 바른 말이란 바르게 말하고 나쁜 말 피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시렁 위에 올려놓고 신비화시킬 것입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침저녁으로 부딪히는 현실 아닙니까? 내가 말을 부드럽고 편하고 듣기 좋게 하면 일이 수월하게 전개되고, 내가 어쩌다 성이 나서 말을 좀 모나게 하면 상대도 괴롭고 나도 괴롭지요. 더욱이나 거짓말이라도 끼어들게 되면 이 참 난처해집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게 하려고 이중삼중으로 거짓말을 또 해야 되고, 그게 잘 꿰어 맞으려면 이 사람한테 이 말 하고 저 사람한테는 저 말 하게 되니까,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하지 말라’ 하는 게 아니에요. ‘거짓말 하지 말라’가 아니라 ‘거짓말로부터 몸을 빼라, 물러서라’, ‘거짓말 근처에 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을 챙기고, 행동을 챙기고, 삶을 챙기고, 생각을 챙기고, 나아가 견해를 바로 챙겨라. ‘정진, 정진’ 하는데, 유별난 호들갑 떠는 정진을 하지 말고, 차분한 일상적 정진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을 서서히 가라앉히고 정화시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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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9
팔정도를 걷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 고요입니다. 마음이 들떠서 무슨 바른 길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지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유지하려니까 그러한 목적에 알맞은 공부가 필요해지는데, 바로 바른 마음챙김, 정념 공부입니다. 이 마음은 마치 야생 코끼리처럼 숲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는데 그걸 붙잡아다가 튼튼한 기둥에 매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해라. 그러나 이 코끼리가 원체 힘이 세서 어떤 끈으로 묶어도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그때마다 천 번 만 번이라도 계속 붙잡아 갖다 매라. 그러다 보면 코끼리는 지치고 내가 붙들어 매는 끈은 조금씩 더 강해진다. 마침내는 야생 코끼리 같은 이 마음을 잡아매게 되는데, 그 붙들어 매는 데가 어디냐? 부처님은 이 몸, 바로 숨 쉬고 밥 먹고 걷고 일하는 이 몸에다 마음을 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길’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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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10
결국 ‘고苦’로부터 시작하여 ‘도道’로 맺어지는 사성제의 순서는 도道의 길이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시작된다는 구체적 상황을 얘기함으로써 고로부터 벗어나는 그 길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찾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비화, 우상화, 서두름, 공부 길의 다양한 유혹 등 각종 샛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여기’에서 출발해서 나아가도록,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장치가 사성제 순서의 짜임새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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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11
일상 수행의 구체적 과정 속에서도 사성제의 순서가 절묘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멸성제는 고성제와 대칭 관계에 있습니다. 집성제를 중심으로 해서 십이연기를 순서대로 순관順觀하면 고로 귀결되는 고성제가 되고, 십이연기, 즉 집성제를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고…’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면에서 역순으로 또는 역관逆觀하면 열반에 이르는 멸성제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집성제를 중심으로 고성제와 멸성제가 대칭 관계에 있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십이연기의 순관을 통해 고성제의 진리성을 확인하게 되고 반면 십이연기의 역관을 통해서는 멸성제의 진리성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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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12
하지만 이 순·역관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식이 없으려면 행이 없어야 하고, 행이 없으려면 무명이 없어야 하며 한편 확연히 식이 없어지기 전에는 열반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명이이 없어야 행과 식이 없을 수 있다’는 논리가 되는 셈인데 내가 지금 식 놀음을 하면서 ‘식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면 모순밖에 안 되지요. 식으로써 식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니까. 결국 멸성제가 진리라는 것이 추측은 되는데, 추측은 진리의 길이 될 수 없으므로 ‘가봐야 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지식을 넘어 실제로 가야 한다.’는 실천도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일어납니다. 이는 ‘알음알이를 초극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단을 강요받는 상황이 됩니다. 이것이 십이연기 역관이 제기하는 요청 사항입니다. 즉 멸이 있다는 부처님 말씀에는 신뢰가 가는데, 그걸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알음알이 놀음을 중단하는 길 외에는 행이 없고, 그래서 무명까지 없어지는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알음알이 놀음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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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13
그런데 다행히 고성제와 집성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충분한 확신을 주신 다음에 멸성제로의 가능성 제공과 동시에 결단 촉구를 해 주시기에, 우리는 마지막의 도성제를 스스로 밟아보려는 결심을 할 수 있게끔 됩니다. 알음알이로 십이연기의 끝까지 갈 수 없으니, 즉 무명이 없어지는 데까지 이를 수 없으니, ‘무명을 없애려면 어떤 본격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구나’ 짐작하게 되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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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8.14
그 대답으로 도성제가 주어집니다. ‘팔정도를 닦아라. 팔정도를 닦으면 멸에 도달한다. 팔정도는 멸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 앞서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를 진정으로 붙잡고 생각하고 씨름했다면, 지금부터는 도성제를 진지한 자세로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바른 실천으로 이끄는 장치가 간단한 네 마디 구조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사성제의 순서는 우리로 하여금 바른 실천도, 팔정도의 실 수행으로 이끄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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