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열반’ 아닌 ‘고’인가?
Paragraph 3.7.1
왜 ‘열반’ 아닌 ‘고’인가?
이렇게 사성제의 개요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고, 집, 멸, 도 하나하나를 이해하면 사성제 전체를 이해한 것일까요? 보통 사성제라 하면 네 가지 각 항목에 잡혀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가 진리고, 고의 멸이 진리라고 생각은 하는데, ‘왜 고로 설명할까’라든가, ‘왜 진리가 네 가지일까’라든가, ‘왜 고 다음에 집, 그 다음에 멸, 그 다음에 도, 이런 순서로 되어 있을까’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씁니다. 오늘은 그 짜임새가 사성제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뜻에서 사성제의 구조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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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2
우선 ‘왜 열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고를 중심으로 진리를 설명하셨을까’를 생각해봅시다. 불교의 구경목표는 열반이잖아요. 그러면 ‘열반성제’라고 하면 일단 수월하게 끝나버린단 말이지요. ‘열반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왜 열반은 비추지도 않고 ‘고’, ‘고의 집’, ‘고의 멸’, ‘고의 멸에 이르는 도’ 이렇게 고를 축으로 진리 체계를 짜셨을까? ‘열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왜 ‘고의 멸’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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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3
부처님은 한마디 말이라도 가볍게 쓰시는 법이 없습니다. 경에 나오는 그 많은 말씀이 어느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게 없어요. 참으로 ‘보시는 분’이요, ‘아시는 분’입니다. 정말 꿰뚫어 아시는 분이에요. 그렇게 용어를 면밀하게 쓰시는 분이 왜 열반으로 설명하지 않고 고로 설명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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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4
그것은 네 번째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그렇게 상세히,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세 번째 열반 자체에 대해서는 상세한 말씀을 하지 않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이 열반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봅니다. 왜 열반이라는 말을 피해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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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5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오취온五取蘊, 즉 오온에 대한 집착 덩어리지요.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집착의 덩어리가 바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오취온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가운데 있는 상에 있습니다. ‘상想’은 빠알리어로는 ‘산냐saññā’입니다. 부처님은 ‘상’의 문제를 아주 체계적으로 다루시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상을 멈출 수 있느냐가 핵심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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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6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를 말씀하신 의도도 거기에 있어요. 무색계가 바로 상의 세계거든요. 최고의 정定을 이루어 다가가는 그 세계가 기껏해야 상의 세계이고, 관념의 세계이고,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색계에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해탈·열반일까요? 이 부분에서 많이들 오해합니다. 욕계 위에 색계가 있고, 색계 위에 무색계가 있으니, 무색계에 올라가면 이제 열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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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7
무색계는 가장 높은 정의 세계이지만, 그게 오히려 헤어나기 힘든 수렁입니다. 무색계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불교에서는 시간의 상대성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색계의 하루는 욕계에 속한 인간계에서는 몇 백 년이라든가 몇 천 년에 해당하지요. 무색계의 하루라는 게 있다면 그 하루는 여기서는 몇 천만 년일 수 있겠지요. 무슨 뜻이냐? 색계나 무색계에서 얼쩡거리다가는 부처님 법을 다시 만나는 건 하세월일 것입니다. 그곳 어디에서 몇 해, 지구상의 햇수로는 몇 억 년을 지난 다음에 그때 지구가 있을지 없을지, 암흑시대를 만날지 부처시대를 만날지는 보장이 없겠지요. 그러니 열반으로 간다는 목적에서 볼 때, ‘색계나 무색계의 정에 빠지는 건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거기 한 번 빠지면 길고 긴 윤회에 또 휩쓸리니, 어떡하든 욕계에 있을 동안 특히 인간계에 있을 동안 일을 끝내라, 죽더라도 욕계 안에서 맴돌지, 색계나 무색계에서 몸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설은 아닙니다. 제가 보건대 틀림없이 그렇단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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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8
정定에 들어서 색계정을 체험하는 것과 색계의 몸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색계정에 집착해서 거기에 매달려 있다 보면 죽어서 그 몸을 받습니다. 취取가 있으면 유有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부인은 그 ‘취’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색계정이나 무색계정에 집착하는 것은 상오분결上五分結1의 첫머리 두 개에서 지적하고 있지요. 참으로 공부인이 경계해야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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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9
보통 정定에 너무 집착해서 정을 이루려고 애쓰는데, 정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다 보면 집착이 몸에 배어버린단 말이지요. 간절하게 정을 추구하고 누리다가 눈을 감으면 그 집착 때문에 색계나 무색계 몸을 받습니다. 상想의 세계에서 노닐다 보면 열반의 인연은 멀어져버려요. 끔찍한 이야기지요. 정을 잘 누리고 활용하되 인간계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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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10
튼튼한 기초인 계부터 공부가 잡히지 않은 사람이 정을 서두르다가 뭘 좀 본 다음에는 고칠 길이 없어요. 그 집착, 그 강한 아집을 벗기 힘들어요. 그러니 이 공부는 서두르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몸 받기 전에도 수천수만 생의 몸을 받아왔는데, 그 수십억 겁을 법을 모르고도 살아왔는데, 금생에 갑자기 무엇이 급할 일이 있어요? 이제 법 만난 것, 정확하고 확실하게 단 한 걸음이라도 내디딜 수 있게 된 것을 오히려 뿌듯하게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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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11
공부가 어떻게 단번에 되겠어요. 그건 공부가 아니지요. 그것은 뭔가에 취한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지요. 사람이 공부 덩어리인데, 아이가 어떻게 단번에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겠어요? 애들보고 ‘너 이렇게 하면 단번에 공자 되고 석가 된다.’ 하는 것은 속된 말로 ‘애들 꼬시는 말’인 겁니다. 말법 시대가 될수록 이런 현상이 도처에 성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부처님의 법을 면밀하게 살펴 들어가는 침착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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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7.12
바로 그런 점에서 열반을 ‘고의 멸’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열반이 최고의 궁극적 진리다’라고 하면, 수행 실천을 통해서 차근차근 열반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저 높은 시렁 위에다가 열반을 모셔버리고 맙니다. 산냐[想]라는 게 그런 작용을 하지요. 뭔가를 접하는 순간에 관념화시켜버려요. 관념화한 것은 벌써 나로부터 멀리 유리되어버립니다. 좋은 무언가를 관념화해버리면 그것은 나로부터 너무 멀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열반을 강조하면 사람들은 열반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버립니다. 사로잡힌 순간, 관념화된 열반은 이미 나의 실천 대상이 아닙니다. 흠모, 모방,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이 ‘열반’이라는 말을 피하면서 ‘고’라는 말로써 진리를 표현하셨고, 그것도 하나로 집약하지 않고 고, 고의 집, 고의 멸, 고의 멸에 이르는 길 등 네 가지씩이나 열거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진리가 하나라야지, 왜 넷씩이나 장황하게 늘어놓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배려입니다. 열반이라는 말을 빼고 고의 멸이라는 말로 대체함으로써, 그리고 진리를 네 가지로 보임으로써 관념화를 배제하도록 최선의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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