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苦의 소멸
Paragraph 3.5.1
고苦의 소멸
그러면 고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가? 십이연기에 받침해서 우리 인식이 고성제를 받아들이고 나면, 자연히 연기에 의한 고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의문에 도달합니다. 그 의문에 대한 부처님의 해답이 멸성제滅聖諦입니다. 당신이 깨닫고 보니까 이 세상은 구조적으로 고인데, 하지만 동시에 이런 ‘구조적 고’가 사라질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고가 사라진 경계라 할까, 경지라 할까, 혹은 ‘그곳’이라 할까, 그것을 부처님이 스스로 경험해 체득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이 있음을, 고의 소멸[滅]이 가능함을 선언하십니다. 그것을 멸성제滅聖諦라고 해서 세 번째 항에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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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5.2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열반의 소식’이지요. 그런데 열반이 무엇인지 알기가 너무 어려워서, 심지어 불교 일부에서는 죽음이 열반처럼 되어버린 경향도 있습니다. 그렇게 알기 어려운 경지이지만, 열반의 소식만큼은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선물의 핵심입니다. 그에 비하면 고나 고의 원인은 열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부대시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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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5.3
우리는 무명으로 인해 무명세계의 존재로 태어나 무명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명으로 태어났으니 무명으로 시종하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여러분, 무명無明이라는 말을 보세요. 십이연기에서 다른 말은 모두 적극적인 용어를 쓰면서, 왜 무명에는 ‘무’를 붙여서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했을까요? 예를 들면 갈애라든지 집착이라든지 다 고유의 독특한 뜻을 지닌 적극적인 개념인데, 왜 무명은 ‘아니 무無’ 자를 붙여서 ‘명이 아니다’라고 했을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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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5.4
거기에는 ‘무명’이 ‘명’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무명으로 인해서 십이연기가 일어난다’는 말은, 어느 날 ‘무명無明의 무無가 떨어져나가고 명明이 되면 십이연기도 없어진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중생은 무명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지만 언젠가는 고통을 깨고 명을 누리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명은 명을 전제로 하기에, ‘무가 걷혀서 명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는 암시도 깔린 겁니다. 그래서 ‘고와 고의 멸을 이해하면 고를 멸하고 열반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희망에 찬 소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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