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과 도道의 양축
Paragraph 3.10.1
법法과 도道의 양축
사성제 짜임새의 백미는 전반과 후반의 호응관계에 있습니다. 앞과 뒤가 두 기둥으로서 사성제를 뒷받침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제가 한 게 아니고, 《숫따니빠아따》 제3장 12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고와 고의 집이 하나, 그리고 고의 멸과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 다른 하나, 이렇게 두 가지로 사성제를 봐야 한다’는 말씀이 〈두 가지 관찰[隨觀]〉이라는 경에 실려 있습니다. 두 가지에서도 핵심은 각각의 뒤에 오는 집성제와 도성제입니다. 고와 고의 멸은 어떤 체험세계에 관한 것이고, 십이연기와 팔정도는 어떤 세계로 가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도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고해에 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의 관건은, 이 고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올바로 인식할 것인가와 이러한 인식에 입각해서 어떻게 노력할 것인가, 두 문제가 됩니다. 이 두 문제를 부처님은 십이연기와 팔정도로 해답해 주신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 가르침이 사성제라 하지만, 핵심은 두 축, 즉 연기법과 팔정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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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2
부처님 말씀을 눈여겨보면 법法이라는 말과 도道라는 말이 자주 함께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상응부》라는 경은 빠알리 경 5부 니까야 중에서도 특히 부처님 생전에 설법하시던 모습이 가장 여실하고 생생하게 짤막짤막한 일화로 담겨져 있는 경인데, 이 경에 예컨대 ‘법을 알고 도를 얻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법이면 법 하나만 설하면 되지, 왜 도를 대칭적으로 설하실까? 여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구조적 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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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3
십이연기는 법法, 곧 알아야 할 법입니다. 십이연기의 각 항목은 고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들입니다. 부처님이 십이연기를 말씀하신 것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연기법의 여러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고의 원인을 알라’는 뜻이거든요. 이것들은 부처님 지혜의 언어니까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 깊은 뜻을 체득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려고 노력하고 궁구하는 만큼 연기법은 조금씩 그 뜻을 드러낼 것이고, 우리가 연기법을 이해하는 만큼 우리의 공부는 나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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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4
반면 도道, 즉 팔정도는 얻어야 할 것이고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도는 실천을 통해 해탈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성제 공부는 ‘법을 알고 도를 얻었다’는 말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연기법을 알고 팔정도를 얻음’은 불교 공부의 두 축이자 ‘해야 할 바’의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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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5
그런데 사성제 체계의 놀라운 점은 법과 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명이 있기 때문에 십이연기가 전개되고, 무명이 없으면 십이연기도 멸합니다. 바로 그 무명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십이연기의 역관과 팔정도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몸 다시 안 받으려면 집착이 없어야 하고, 집착이 없으려면 애착이 없어야 하고, 애착이 없으려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이 없어야 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없으려면 사물에 한눈파는 게 없어야 하겠고, 한눈파는 게 없으려면 육입 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팔정도로 치자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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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6
나아가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의 힘으로 더 밀고 나가면 마침내 명색이 사라지고, 식이 사라지고, 행이 가라앉아서 무명이 깨어지는 것이지요. 팔정도로 말하자면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집중을 통한 바른 견해의 완성인 것입니다. 십이연기와 팔정도는 서로 호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십이연기와 팔정도가 그대로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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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7
이처럼 법과 도를 양 다리로 해서 사바의 고와, 사바로부터 해탈된 열반을 모두 설명하는 구조가 사성제입니다. 얼마나 치밀하고 완벽한, 더할 나위 없는 지혜의 가르침입니까. 그처럼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아주 절묘하게 이루어진 것이 사성제의 짜임새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법은 정말 완벽하게 짜여 있기에 부처님이 설해놓고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가 사성제를 통해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고, 쓰러진 자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는 부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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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8
이렇듯 여러 측면에서 우리는 사성제의 구조적인 묘미를 맛볼 수 있고, 사성제가 얼마나 절묘하게 이루어져 있느냐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네 가지 각각이 그 나름의 독특한 위치에서 나름의 기여를 하면서 그 모두가 모여서 불교라는 크나큰 가르침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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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9
사성제의 두 축을 놓고 볼 때 불교는 법과 도, 인식과 실천의 두 가지가 결합한 체계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법을 알고 도를 얻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이지요. 불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사성제가 법과 도로 짜여 있다는 것은 불교가 맹목적인 믿음의 요소와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체계라는 말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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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10
초기불교에 관한 한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호합니다. ‘삿다saddha’라는 말을 한자로는 신信, 영어로는 신념[faith]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말의 뜻이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삿다는 이 시대에 쓰는 믿음의 뜻과는 관계가 없고, ‘뭔가 스스로 점검하고 확인해서 마침내는 부동의 신념이 됐다’는 의미의 ‘이지적 확신’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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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3.10.11
그렇게 볼 때 불교는 믿음의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불교가 사성제를 통해 왜 이 세상이 고이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만 봐도, 불교가 얼마나 논리적이고 지적인 체계인지, 얼마나 사람들을 지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대하는 가르침인지 분명합니다. 이천오백 년 전은 인류의 지성이 동물 수준에서 얼마만큼 벗어났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옛 시절입니다. 그런 시대에 부처님이 사성제를 통해 지혜와 관계된 논리 체계를 세우고 계신 것을 볼 때, 이 시대 우리가 하고 있는 지성의 활용은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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