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탐색
Paragraph 2.5.1
마음 탐색
이렇게 마음을 분해하는 일은 그동안 인류가 좀체 해내지 못했습니다. 왜? 세상에 알기 어려운 게 마음이거든요. 이 마음이란 놈을 분해해서 철저하게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심리학이 나오기 전까지는 마음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것입니다. 이놈을 건드리는 순간 대부분 자기 파멸에 빠져버립니다. 마음이란 놈이 어딘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게 내 속에 앉아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데, 이놈 어설프게 칼 댔다가는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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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2
그러니 보통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애매모호하게 그냥 덮어두고서, 거기에다가 이 옷 입히고 저 옷 갈아입히는 노릇을 해왔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옷 입히기 종교입니다. 마음이란 놈을 그냥 두고서 예쁜 옷을 입히면 예쁘게 되겠지, 예쁘게 비치는 거울을 비치면 예쁘게 보이겠지, 마음 자체는 그대로 둔 채 마음을 표출하는 모양새만 가다듬는 데 노력을 해온 것이 기존 종교요, 심지어 서양철학까지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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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3
오늘날 서양심리학은 불교에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2500년 전에 불교는 마음을 법으로 갈가리 찢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서양심리학은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심리학을 개척한 프로이트, 제임스, 아들러 같은 분들이 다 19세기 말 사람들입니다. 〈고요한소리〉에서 펴낸 ‘법륜’ 시리즈 세 번째 《아나가아리까 다르마빨라》에 보면, 이분이 미국에 건너가 윌리엄 제임스 교수 강의실을 방문했더니, 제임스 교수가 강의하다 말고 ‘여기 진짜 강의를 해야 할 분이 오셨다. 한 말씀 해주시오.’ 하면서 자기도 청중 속에 앉아서 그분의 강의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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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4
서양에서는 과거에 마음의 영역이 거의 무시되어 왔었지요. 불교는 처음부터 심학心學입니다. 대상인 물질을 규명해 들어가기보다는 근원인 마음을 규명하는 데 중심을 두어온 독특한 체계입니다. 불교를 심학이라고 본다면, 즉 ‘마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그 본질을 규명해 들어가는 체계라면, 유교는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마음을 어떻게 드러내 보일 것인가.’를 강구하는 체계입니다. 예를 들면 ‘마음을 어질게 써라’, ‘효도하는 데 써라’, ‘친구와 우애하는 데 써라’… 기독교에서도 ‘마음을 사랑하는 데 써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표출 방법을 주로 가르쳐 왔지 ‘마음이 무엇이다.’ 이런 이야기는 안 합니다. 마음을 쓰는 데 관한 것은 불교에서는 계행戒行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계행에서 멈추질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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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5
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포장해내느냐가 아니라, ‘마음 그 자체가 뭐냐?’에 집중해왔습니다. ‘마음’이란 것은 인류가 접근하기 어려운 일종의 성역이었습니다. 마음은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되는 터부시된 영역이었습니다. 왜? 마음이 마음을 건드리다 자칫 잘못하면 대혼란에 빠집니다.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이 마음을 다루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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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6
그런데 부처님의 지혜의 칼에 이 마음은 풍비박산으로 쪼개져버렸습니다. 유일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갈가리 찢어내면서도 조금도 상처를 안 입고 건전할 수 있는 것은 불교가 무아無我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무아에 입각해 있다 보니 마음 그 놈을 칼질 아니라 뭘 해도 상처를 조금도 안 받는 거지요. 왜? 다른 종교는 모두 아我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마음을 건드리는 순간 아我가 먼저 풍비박산되어버려요. 그 공포 앞에서 움츠러들어 꼼짝달싹 못하고 수습하기에 바빠요. 그러나 불교는 무아에 입각해서 마음마저도 완전히 객관적인 연구 대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침내는 마음이라는 놈을 실험대 위에 놓고 갈기갈기 찢고 빗질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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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7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처음부터, 진정한 행복과 향상을 이루려면 이 마음을 완전히 파악해서, 이 마음의 주인이 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고 당당하게 가르쳐왔습니다. 이 마음을 적당히 포장이나 하고, 어떤 형상으로 표출시키고 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반드시 이 마음을 완전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르면 장악 못 하지요. 모르면 신비입니다. 신비는 내 의지의 바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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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8
과학도 신비의 영역을 많이 줄여 왔지만, 오히려 신비는 커지려고 합니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수록 신비의 영역은 넓어져만 갑니다. 왜? 과학자들은 바깥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바깥에서 찾으면 찾을수록 불가사의는 점점 더 넓어집니다. 불교는 그 방법을 처음부터 지양했습니다. ‘아니다’하고 버렸습니다. 진정한 지혜, 진정한 평화, 진정한 향상은 마음이란 놈을 완전히 파악하고 완전히 지배하는 길밖에 없다, 그 외에는 길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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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9
신 앞에 아무리 제사를 지내고 아무리 빌고 아무리 바쳐도 안 됩니다. 여러분도 답답하면 점쟁이한테 찾아가 위안을 얻을 때도 있죠. 그러나 가면 갈수록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은 줄어들고, 나중에는 안 물어 보면 불안해서 한 걸음도 못 떼요. 세상사가 다 그렇습니다. 바깥의 권위에, 바깥의 능력에 의지하려 들면 별 수 없이 거기 매어버립니다. 나중에는 그 지배를 안 받고는 단 한 발짝도 스스로 못 걷게 되고 맙니다. 그게 무당이 챙기는 잡신이든, 또는 희랍인들의 신탁을 들어주는 아폴론 같은 신이든, 아니면 기독교의 유일신이든, 혹은 인간 세상에서 전지전능한 전체주의 독재자든, 누구든 간에 거기에 판단을 의지하면 자기 자신은 속절없이 점점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항상 보는 것이니까 논란의 여지도 없습니다. 바깥에서 해결의 실마리나 해결자를 구하면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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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0
그렇기 때문에 길은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에서 구하는 이것이 바로 지난지사至難之事요,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 중국인도 감히 이 문제에서는 진보를 못 이루었고, 오늘날 세계를 지배한다는 서구문명도 이 문제에서는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입니다. 근래 와서, 그것도 동양과 접한 후입니다. 인도를 지배하면서 자원도 착취하고 노동력도 착취했겠지만, 유럽이 인도에서 진정으로 얻은 것은 ‘밖에서 구하던 것을 안에서 구하는 것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유럽의 세계 침략의 결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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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1
마음을 분석하고 지배하는 일이 말은 쉬운 것 같지만 실지로 하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가? 이 마음을 다루는 데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선입견입니다. 이건 착각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경우가 하루에 몇 분간이나 가능합니까? ‘내 마음’이란 것, 실제로는 이것처럼 못 믿을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왜 울고불고, 스트레스 받습니까? 세상살이가 왜 고됩니까? 사실은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따라주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을 완전히 장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맨날 마음에 휘둘리며 삽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곤 안심하고 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마음에 의지합니다. ‘내 마음인데 뭐’, ‘내 맘대로 하는데 뭐’ 이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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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2
정말 내 마음대로 하는 겁니까? 전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번 돈 내 맘대로 쓰는데 무슨 문제야.’ 이런 말 합니다. ‘내 맘’입니까? 벌려고 한 것도 쓰는 것도 마음이란 놈이지만, 이 마음이란 놈이 내 의지나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옵니다. 제 멋대로 나옵니다. 이 마음은 폭군입니다. 지배? 좀처럼 안 받습니다. 지배받으며 온순하게 엎드려 있는 놈이 아니라고요. 조금만 자극 받아도 펄쩍펄쩍 뛰고 난리 납니다. 내 의지하고 관계없어요. 나는 그만하고 싶은데 마음이 안 따라주지요. 저는 저대로 놀아요. 그래서 ‘내 마음이다’ 하고 안심하는 것처럼 큰 착각과 위험은 없습니다. 차라리 ‘내 육신이다’ 하는 게 오히려 낫습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이 몸은 늙고 노쇠하고 병도 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지속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찰나지간에 변하니 다음 순간에 어떻게 될지 내가 예측도 못해요. 이 마음 어디로 달아날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도 ‘내 마음’입니까? 우리는 누구나 ‘마음이 내 것’이라는 중대한 착각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마음과 맞닥뜨리면 당황하고 어쩌질 못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서양인도 중동인도 이 마음을 감히 제어를 못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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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3
또 하나의 어려움은 두려움입니다. 마음을 조금 들여다보면 무섭습니다. 이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자기 마음을 거울에 비추듯이 발가벗겨 놓고 보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내 마음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추한 것인가.’ 하고 깜짝 놀랍니다. 누구나 자기는 청정하다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막상 마음을 조금 들여다보면 처음부터 그 새로운 모습들에 놀라 빨리 뚜껑을 닫아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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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4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통제하지 못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다루는 기술과 능력은 발전이 안 되었습니다. 개발이 안 되다 보니 항상 덮어놔 놓고 쉬쉬하면서 지내다가, 막상 어떤 일에 부닥치면 또 ‘내 마음이야’ 하면서 그 알량한 마음 가지고 남을 무시도 하고 경멸도 하고 저 잘난 체하고 아만도 부리고 자존심도 부리고 별짓을 다해요. 그래서 업을 쌓고 있습니다. 한없는 업을. 다음 생 그리고 또 다음 생을 확보해주는 수밖에 없는 업을 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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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5
현대의 문화적 위기도 알고 보면 이 문제로 귀착됩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하고 썩을 대로 썩어도 이것을 ‘내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게 오늘날 현대의 문화입니다. 마음이 제멋대로 노는 걸 ‘자유’란 이름으로 오히려 보호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걸 누가 감히 말려.’ 이런 식이지요. 자기 좋아서 하는데, 제멋대로인데, 왜 간섭을 해? 이런 식의 자유지요. 마음을 성역으로 일단 인정해 놓고 벌이는 자유론이죠. 민주, 자유, 다 좋은 말입니다. 자유는 해탈 아닙니까.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나 마음을 성역으로 설정한 자유는 이 꼴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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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6
텔레비전이나 모든 사회경제가 구조적으로 성역이 되어 있는 이 마음을 시봉하는 일에 매달리는 데서 오늘날의 모든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모두 다 마음이라는 성역을 미리 설정해 놓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마음, 이것을 성역으로 모셔 놓고 그게 썩든 말든 그냥 둔 채로 분칠만 하고 옷만 갈아입힐 것인가, 아니면 그 마음을 성역에서 끌어내려서 조각조각 내는 데 착수할 것인가, 그래서 좋은 놈은 영양 공급을 하고 빗질을 해서 가다듬고 나쁜 놈은 고사하도록 하는 일에 착수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중차대한 과제에 현대문명이 봉착해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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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7
이 마음 빗질은 오로지 무아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불교라고 해서 불교의 외투를 입었다고 해서 마음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는가? 어렵습니다. 이 일은 무아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다듬어서 마침내는 이 마음을 갈가리 찢고 빗질해낼 수 있도록 나라는 에고ego가 아닌 진리로, 즉 마음을 법으로서 대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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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8
이 험난한 일을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부처님이 해내신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인류의 스승입니다. 왜 그분이 지금까지 우리의 스승인가? 바로 문제의 핵심으로 접근하고 해결하는 데 관건인 이 마음이란 놈을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지배하느냐에 완전히 성공하셔서 아주 체계 정연하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Buddha’이노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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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2.5.19
요는 이 마음을, 가장 다루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포착하기 어려운, 그리고 잘못 건드렸다가는 수습 불가능한 혼란을 일으키는 이 마음을, 아무 탈 없이 갈가리 찢고 빗질하고 댕기를 땋아 내리는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불법佛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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