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과 불법佛法
Paragraph 17.1.1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이야기하는 방식을 좀 바꾸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질문을 하고 제가 답변하는 식으로 해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부처님의 법[佛法Dhamma]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일상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확인하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기탄없이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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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2
일상생활과 불법佛法
질문: 부처님 가르침과 우리의 생활이 같이 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컨대 스님 말씀처럼 중도中道를 행해야 된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실제 매일매일 일상생활에서 불법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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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3
스님: 불법佛法과 우리가 경험하는 실세계가 과연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군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법과 일상생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생활에서 과연 불법이 정말 도움이 되는 유효한 길인가?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겪고 있는 고苦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고苦와 고의 멸滅’을 말씀하셨지요. 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가 불법의 핵심입니다.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사유[正思]를 가지고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자 생활 자체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당장은 그 괴리가 참 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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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4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열반解脫涅槃입니다. 그렇건만 세속생활은 해탈·열반을 생각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각박하고 험난한 고생살이입니다. 세상살이는 욕망에 집착하여 물질과 권력을 탐하도록 우리를 구조적으로 짜 넣습니다. 가시밭길 같은 세상 속에서 해탈 ·열반을 생각하고 앉아 있는 사람은 낙오자나 열패자劣敗者가 되기 십상이라는 걱정을 할 수 있습니다. 짧게 보면 그럴 수 있지요. _그런데 부처님이 세상과 인간을 보시는 눈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누구의 아비이고,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친구이고, 어떤 경력을 가진 존재로 보지만, 부처님이 보시는 눈은 전혀 다릅니다. 금수를 포함하여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누구 없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의 표현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태어나서 누구의 아비가 되고, 어떤 사회적 성공이나 거두고, 희희낙락하다가 사라져가는 그런 값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경험일 뿐이고, 그 경험을 통해 추구하게 되는 본질은 따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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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5
모든 인간 경험의 본질적 의미는 ‘존재의 완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든 인생 경험을 통해 존재의 완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은 사바세계라는 학교에 속해 있는 학생입니다.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六道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때로는 월반이나 진학도 하고, 때로는 공부를 안 하고 게으름 부려서 낙제나 유급도 하고, 심지어는 퇴교도 당하는 학생인 겁니다.
끊임없는 생의 연속 속에서 어떤 존재를 받아서 공부를 잘 하면 다음 생에서 계속 진학하여 천상에 가서 충분한 복락도 누리고, 공부를 못하면 퇴학을 당해서 축생의 몸도 받고, 지옥에도 빠지고, 아귀가 되는가 하면 아수라가 되기도 하면서 윤회의 쳇바퀴를 돕니다. 그렇게 돌고 돌면서 존재의 완성, 즉 지혜와 덕성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존재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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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6
요컨대 부처님은 우리를 업 덩어리, 업체業體로 보십니다. 불교에서는 남자나 여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업의 덩어리, 업의 구현체로 보는 것입니다. 금생에 복을 많이 누리면 그냥 ‘팔자가 좋다’고 보는 게 아니라, ‘선업善業을 많이 지니고 있는 업 덩어리구나.’ 이렇게 봅니다. 공부를 잘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전생에 지혜를 많이 계발해서 상당한 향상의 분상에 있는 업체구나.’ 건강한 사람을 보면 ‘선업을 많이 지어서 건강의 복을 누리고 있는 업체구나.’ 그렇게 존재를 인과因果의 원리에 따라 나타난 업체로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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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7
세상사 모두는 인과의 고리로 끊임없이 이어져 흘러가는 흐름입니다. 인간사를 길게 보면 기민하고 약삭빠르게 행동하여 성공한다고 해서 그게 성공인 것은 아니지요. 인과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한 가지 인因을 짓고 그 인에 대한 과果를 상정하는 버릇이 있는데, 인과는 그렇게 간단한 구조가 아닙니다. 인이 되는 업은 온갖 가닥이 모여 엮여나가는 흐름이므로 여러 업이 총체적으로 모여서 과를 빚어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지요. 하지만 요즘같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우리 생애 안에 인과의 흐름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업체로서 존재를 보면 무상한 영고성쇠榮枯盛衰 중의 어느 한 생에서 좀 잘됐다고 자만하거나 희희낙락하고, 조금 안 되었다고 한탄하고 자괴감을 가질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허망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고성쇠를 도도히 흐르는 업의 흐름에서 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를 구현해가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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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8
우리는 금생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음 생에 또 태어나고, 윤회가 끝날 때까지 거듭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었다고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 자체는 생이라는 한바탕 연극의 끝이 아닙니다. 그저 연극의 한 막이 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업의 무대에서 한 막이 내리면 다시 새 옷 입고, 새 분장하고, 새 육신을 덮어쓰고 나와서 또 다른 업을 짓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하고 노쇠해서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으면, 다시 죽음이라는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몸을 받고 새로운 역할을 맡아 또 무대에 등장하는 겁니다. 윤회하는 생의 무대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러한 존재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궁극적으로 가고 있는 방향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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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9
존재체가 궁극적으로 가닿는 그 곳, 그것을 우리가 쓰는 언어로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길이 없어서 부처님은 그 명칭을 ‘열반涅槃nibbāna’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반은 ‘불어서 끄다’, ‘존재를 불어서 꺼버린다’는 뜻입니다. 즉, 이 하잘것없는 존재의 양식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반은 어떤 상태인가?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은 자세한 설명을 안 하십니다. 우리 존재체는 오온五蘊의 가합假合이지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존재체입니다. 그런데 ‘오온 다 멸한 경지가 열반이다’, 이런 식으로 언중에 암시되고 있습니다. ‘불어서 꺼진’ 열반의 세계, 이 덧없고 속절없고 가치 없고 고통스럽고 무상無常할 뿐인 이 존재체를 완전히 불어 꺼버린 것입니다. 그 이상은 언어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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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0
우리는 식識viññāṇa을 통해 모든 사유를 합니다. 수受, 상想, 행行의 작용도 모두 식을 통해 일어납니다. 열반은 인간의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알음알이가 가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색 ·수·상·행·식이 끊어진 참으로 높은 세계인 열반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존재체입니다. 대승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어느 시점에 가서는 성불해야 하고 성불하고야 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몸을 빌리고 있건, 지옥에 빠져 있건, 그 모두가 언젠가는 성불하게 마련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성불로 가는 길이야말로 존재의 의미인 것입니다. 열반은 바로 그 존재의 의미를 구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돕기 위하여 부처님이 나오셔서 법을 설하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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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1
부처님은 그런 입장에서 세계를 보고 법을 설하십니다. 부처님 법은 존재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실제 생활 하나하나에 바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면 업 덩어리인 우리가 부처님 법대로 살면 선업을 짓게 됩니다. 지금부터 ‘성을 내지 않는다’는 걸 생활에 실천한다고 합시다. 그런 결심을 하는 데는 ‘성을 내서 좋은 일이 없으니, 성을 내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성내면 좋지 않다’는 것은 일상적 원리이지요. 부처님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며 향상을 가로막는 장애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법대로 살면 적어도 성을 내어 고통 받는 비극은 줄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 법은 실생활에 좋고 우리의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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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2
또 욕심 때문에 망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보아왔으니까 ‘욕심을 적게 내면 스트레스도 적게 받으니 훨씬 행복하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거나 ‘욕심을 버리라’는 것도 ‘욕심이 없는 게 좋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지요. 이 역시 부처님 법대로 살면 적어도 탐욕을 부려 고통 받는 비극은 줄일 수 있습니다. 법이 일상생활에도 좋고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 받는 원인의 상당 부분은 열등감과 공포감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형태의 불안과 공포감에 짓눌려 살고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공포감, 죽음에 대한 공포감, 병에 대한 공포감도 있을 것이고, 남보다 뒤떨어지고 패배하는 데 대한 공포감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공포감을 불교에서는 치암癡暗, 즉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지요. 알면 두려울 일이 없으니까요. 불교는 치암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치암 없애기를 가르치는 불법대로 살면 어리석어서 고통 받는 비극은 줄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불법은 현실적으로도 매우 유용하고 향상에 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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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3
욕심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고 공포에 떠는 마음, 이 탐·진·치 삼독을 우리 마음에서 제거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없애는 데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향상의 길을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렇게 욕심이 없고, 성낼 줄도 모르고, 사리대로 살고 부처님 법대로 살아서 조용해지면 현실생활에서 에너지가 떨어지고 활동력이 상실되고 열패자劣敗者가 될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 하는 우려도 항상 따라다닙니다. 눈 뜨고 코 베어 갈 세상에 무슨 부처인 양 어설픈 수행자가 된다면 과연 살아남기나 하겠는가? 언제 어느 귀신에 홀려서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염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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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4
예를 들면 내가 누구하고 어떤 업무상 거래를 할 때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자세를 견지한다면 과연 그 거래가 성공할 수 있을까 싶지요. 눈앞의 단기적 사안에 대해 생각하면 실패할 가능성도 있어요. 어떤 때는 짐짓 성을 내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텐데 원체 성낼 줄 모르고 좋게만 대하니 저쪽에서 그런 나를 거꾸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사례별로 일일이 그런 염려를 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염려보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저 사람을 다루는 데는 강한 태도를 견지해서 성도 좀 내야 된다.’고 판단하는 것도 지혜의 일종입니다. ‘지금은 짐짓 성을 내야 한다.’고 알면 그것도 지혜입니다. 그 사람의 나쁜 성향을 제어하기 위해서 내가 성낸 척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낸 표정을 짓고 성낸 언행을 합니다. 이것도 지혜의 발휘입니다. 왜냐하면 성내는 척하면서 성냄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지 진짜 성을 내서 성냄에 지배당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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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5
그렇게 본다면 현실생활과 불교와의 괴리乖離라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부처님 법을 제대로 모르고 부분적으로만 또는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우일 뿐입니다. 사실상 불법을 잘 알면 알수록 현실적으로도, 향상의 분상分上에서도, 언제나 이로울 따름입니다.
부처님은 ‘이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신의 말씀이 처음 서두도 좋고, 중간 논리 전개도 좋고, 그 결론도 잘 지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법은 처음에 일상생활에서 비근하게 쓰는 데도 좋고, 수행의 분상에서 본격적으로 탐구해 가는 데도 좋고, 가면 갈수록 더 험난해지는 수행의 길에서 끝까지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데도 좋다는 뜻입니다. 이 후자의 뜻이 그 말의 원뜻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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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6
왜 부처님 법이 공부 길 내내 필요할까요? 어느 정도 공부하면 뭔가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정신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그 집중된 힘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든지 또는 남을 제압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든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게 막상 공부에 있어선 최대의 장애이자 마장입니다. 어설픈 수행자들이 그러한 경계에 가서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지만 부처님 법을 철저히 아는 사람은 그러한 경계가 와도 거기에 주저앉는 일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 마침내는 출가의 목적을 성취하는 큰 위업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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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7.1.17
부처님 법은 해탈·열반이라는 궁극적 이상을 제시할 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참으로 이익되게 도와줍니다. 불교공부가 따로 있고 세속공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세속생활을 교과서 삼아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또 받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불교는 우리 실생활의 체험과 결코 유리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법과 일상생활은 하나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세속생활에서도 이익이 된다.’라고 해야 이치에 맞습니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실 수행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자신에게 정직하고 남에게 자비로워서 손해를 보는지 이익을 보는지는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그 이상 말을 덧붙이면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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