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시간관
Paragraph 14.5.1
불교의 시간관
그러면 불교는 시간을 어떻게 보는가? 불교는 윤회輪回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봅니다. 불교에서 ‘시간은 윤회의 장場’입니다. 일직선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도달하신 열반涅槃에는 시간·공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시간·공간을 넘어서 모든 것을 바라보십니다. 부처님 당시의 현실이나 오늘 여기의 현실이나 부처님 눈에는 오버랩 되어서 똑같이 눈앞에 있는 겁니다. 오버랩 된다는 것은 시간·공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오취온五取蘊 고를 겪는 윤회의 고는 사바세계의 특성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요는 ‘열반의 세계에서는 시간·공간이 없고, 반면 무명無明에 의해서 생겨나는 윤회의 세계에서는 시간·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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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2
이처럼 시간·공간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게 아니고 무명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시간이라는 어떤 객관적 실체가 따로 있고, 그 시간의 시작과 끝이 직선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치암癡暗의 극치입니다. 바로 서양식의 시간관 자체가 무명의 극치인 것입니다. 시작점이 있다면 그 전에는 무엇입니까? 끝이 있다면 끝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무無일까요? 무에서 유가 창조주에 의해서 만들어 졌을까요? 그렇다면 그 창조주의 존재가 반드시 확인되어야지 신화적 베일로 감춰진 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달리 무명을 입증하는 것밖에 더 무엇이겠습니까? 불교에서처럼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시간에는 시작도 끝도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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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3
만일 시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려면, 최초의 절대자 창조주가 있어야 하고, 최초의 말씀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면 최후도 있게 마련이니 인류도 멸망해야 되는 거지요. 그러나 시간은 본래 없습니다. 다만 둥글둥글 순환 회전하면서 돌아가는 운동의 흐름이 있을 따름이고, 게다가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어요. 흔히 말하는 시간과 공간이란 무명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시간·공간이 없는 진실의 세계에 대해서 모르니까 바로 그 때문에 시간·공간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시간·공간은 원래 있는 게 아니라 무명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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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4
시간·공간이 없는 상태를 직접 경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우리는 시공관時空觀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시‧공 속에서 살아왔고, 시‧공을 조금도 떠날 수가 없지요. 시간·공간에 완전히 묶여 있습니다. 따라서 ‘해탈·열반’이라는 말씀이 까마득하고 도저히 실답게 들리지 않게 마련입니다. 사실 오늘날 지구상에 불자佛者도 많고 온갖 진리 탐구자들도 많지만, 시·공간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해탈·열반이 도저히 실감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니라 윤회라는 불교적 시간 개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명에서 벗어나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으려면 반드시 불교의 시간관에 눈떠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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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5
윤회는 시간에 대한 직선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대단히 놀라운 우주관입니다. 부처님이 인도를 택하여 태어나신 것도 거기에 윤회를 받아들이는 문화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회의 시간관을 이해할 만한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거기에 태어나서 법法을 펴신 거지요. 부처님이 유태 땅에서 태어나셨다면 윤회고의 가르침을 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처럼 시간에 대한 관념은 인간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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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6
윤회의 시간 개념에서 볼 때 불교는 창조론도 아니요 진화론도 아닙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물론 창조설과 진화설이 나온 배경을 이해는 합니다. 그렇지만 둘 다 진리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창조론이나 진화론을 상想이 벌이는 신기루로 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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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7
창조와 진화는 일직선이지만 윤회는 일직선이 아닙니다. 진화라는 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니까 후퇴는 없지요. 그런데 윤회에서는 인간이 좋은 업 지은 만큼 향상도 하고, 나쁜 업 지은 만큼 퇴보도 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일직선적인 향상이라든가, 종국적인 파멸이라든가 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일찌감치 벗어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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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8
또한 시간을 공간의 연장선으로 보는 우愚도 범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볼 때 그렇게 말하는 시간은 공空한 것입니다. 공한 것을 놓고 그것을 물질화시켜서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1에서도 과거 유태교에서 시작되어 근대의 ‘절대시간’ 개념으로 이어지던 전통을 타파하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떤 과학자는 시간이라는 것을 행위의 궤적으로 이해하고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은 환상이며, 시간의 시작이라는 문제가 언제 해결 될지 모르는 미제의 숙제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어떤 편지에서 ‘우리와 같은 열성적인 물리학자에게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은 환상이다.’라고 한 말처럼 서양의 이성이 전통적 시간관을 문제 삼고 있는 예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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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9
무시무종의 윤회적 시간관이기에 불교는 시간을 굉장히 너그럽고 여유 있게 대합니다. 공空하다는 것도 대상의 실재를 부정할 뿐 공 자체는 온갖 것을 다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말하는 면도 있지 않습니까. 비어있으니까 뭐든지 그 안에 포용할 수 있지요. 그러한 너그러움, 어머니 품 같은 너그러움, 그런 것이 시간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시간에 대해서 긴장하고 증오하고 불안에 떠는 것 같은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윤회의 시간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업業이 있고 연기법緣起法이 작용하니까 윤회가 있는데, 거기에 시간이라는 발상이 붙은 것일 뿐 시간이 실재한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지구가 언젠가 파멸해도 성주괴공成住壞空에 의해서 또 새로 생겨나고, 그러면 또 부처가 나와서 법法을 세워 주시니, 숱한 과거불이 있었듯이 미래불도 계속 나타날 것이므로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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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4.5.10
그런 성주괴공의 시간 속에서 오로지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이놈의 끝없는 윤회의 고를 어떻게 벗어나 해방을 이룩해 낼 것인가?’, ‘시간을 어떻게 자기 향상의 계기로 삼아낼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시간!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없는데 다만 한 가지, ‘이 시간을 내가 선용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그리하여 ‘시간을 향상의 계기로 살려내는 데 얼마나 성공할 것인가?’, 이것만이 관심사입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시간의 끝으로 보이는 죽음이란 것도 금생에 내가 어느 정도 노력했느냐를 돌아보는 더없이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죽음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전율하고, 긴장하고, 마치 마지막인 양 몸부림치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금생今生을 마감하는 죽음을 ‘금생의 내용이 어떠했느냐?’를 점검해 보는 엄숙한 기회로 삼고 그래서 보다 향상하는 내생을 염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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